1493 - 콜럼버스가 문을 연 호모제노센 세상
 2021. 1. 16. 04:22  적토마's 지껄이기/내가 읽은 책  적토마코치   comments

콜럼버스적 대전환, 글로벌라이제이션, 호모제노센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용어이다. 1493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단지 우리가 어렸을 적 배웠던 스페인의 용감하고 모험심이 강한 한 남자의 어드벤처 이야기가 아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지구는 세계화라는 역사의 물줄기를 틀 수 있었고 호모제노센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호모제노센이다. 이 용어는 균질화, 동질화를 의미한다. 저마다 서로 다른 성분들이 뒤섞여 균질화된 조합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일컫는다. 콜럼버스적 대전환으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생태상 뚜렷하게 구분되었던 장소들이 점점 유사해졌다.
-본문 발췌 p51-

 

호모제노센은 세계가 똑같아지는 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책에서는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가 똑같아지는 현상을 인용하며 이 용어를 설명한다. 콜럼버스적 대전환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를 건설하며 시작된 대륙간 이동과 무역, 노예제도로 인해 글로벌라이제이션과 호모제노센이 야기된 것을 얘기한다.

 

콜럼버스가 모험을 떠는 이유는 단 하나,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서였다. 즉 오로지 중국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떠난 것이다. 유럽은 중국의 실크와 도자기 등의 중국산에 빠져 있었는데 중동과의 관계와 국제 정세에 따라 원활한 교역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을 찾기 위해 서쪽으로 나선 것이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는 지금의 아이티 영토인 히스파니올라 섬에 '라 이사벨라'라고 명명한 전초기지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다. 동시에 서쪽으로 진출해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닿으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콜럼버스적 대전환의 첫 번째 주인공은 말라리아다. 영국인 존 롤프는 아메리카의 영국의 식민 개척지 제임스타운을 통해서 베네수엘라산 니코티아나 타바쿰 씨앗(담배 재배 위한 씨앗)을 영국으로 가져왔다. 그 당시 영국 청년들은 담배에 빠져있었는데 존 롤프에 의해 니코티아나 타바쿰 씨앗을 들여오면서 말라리아 원충들이 씨앗을 통해서 의도치 않게 딸려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결국 유럽에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경을 낳았다.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말라리아로 인해 많은 유럽인들과 인디언들이 죽었다.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들어온 말라리아(플라스모디움 비백스-삼일열말라리아 원충)도 있었고 일부는 아프리카(플라스모디움 팰시파럼-열대말라리아 원충) 노예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식민 개척지에는 인디언 노예와 아프리카 노예가 주를 이루었는데 말라리아로 많은 유럽인들과 인디언들이 죽어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상대적으로 말라리아에 강했던 아프리카 노예를 본격적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말라리아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를 건설하지 못하는 지역은 착취 목적으로만 운영하게 되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노예들과 아메리카 대륙은 전체적으로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노예들은 유럽인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동원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은채굴이었다. 은은 중국과의 교역에 필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왕조시대가 바뀔 때마다 기존 황제가 발행한 주화를 자신의 그것으로 자주 바꾸는 바람에 통화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로 인해 하룻밤 새에 자신의 자산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해 상인들과 농부들 사이에는 가치의 변함이 적은 실물화폐인 은의 수요가 증폭되었다.

 

중국은 은을, 유럽은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를 원했기에 두 세계의 교역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스페인은 중국의 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인디언 포획과 아프리카 노예 수입을 더욱 증가시켰다. 이 무지막지한 은 채국 사업으로 인디언, 아프리카 노예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일제의 군함도가 떠오른다.

 

한편 중국(명나라)에서는 막대한 은의 유입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때문에 서민들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의 가치가 떨어져 같은 양의 세수를 거둬들여도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방비로 감소를 불러들였고 국내외 불안한 정세와 함께 만주족에 의해 정벌되어 청나라가 세워지는 데에도 일조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강력한 주민들의 서쪽 이주 정책을 폈다. 서쪽으로 이주한 주민들은 가장 먼저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했다. 벼, 밀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과의 은, 비단, 도자기 교역으로 아메리카 작물들이 함께 들어왔다. 바로 옥수수, 고구마 감자였다. 이 아메리카 작물들은 척박한 땅에서도 아주 잘 자라주었기 때문에 청나라 주민들은 더 이상 굶주림으로 죽는 일이 적어졌다. 이는 중국이 세계 최대 인구 보유국으로 올라서는 가장 큰 요인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한 국가의 영토와 맘먹을 정도의 산맥에서 수없이 많은 나무를 베고 옥수수, 고구마, 감자, 담배 등을 재배하느라 토양은 금방 수명을 다했다. 그로 인해 식량을 거둘 수 있는 땅이 부족해져 더 많은 산을 깎아 대고 결국 대홍수가 잦아지는 등 현대까지도 그 폐해가 이어지고 있다.

 

유럽도 옥수수, 감자, 고구마가 진출하는 계기로 폭발적 인구 증가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식물이 자라는데 질소가 필수요소라는 점이 밝혀지고 비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페루의 친차제도의 섬에는 조류의 배설물이 수천 년간 쌓여 구아노라고 하는 퇴적층을 이루었다. 이 구아노가 최고의 비료라는 점이 알려지며 수많은 노예들을 통한 채굴로 유럽에 수출되었다. 동시에 파이토프토라 인페스턴스라는 잎마른병을 초래해 식물을 고사시키는 병을 유발하는 균들이 구아노 수출 선박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것이다.

 

또한 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감자를 습격하는 딱정벌레들이 미국으로부터 들여왔다. 때문에 수백만의 인구가 굶주림으로 전멸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전 세계적으로 파이토프토라 인페스턴스를 비롯한 병충해들을 박멸한 목적으로 독성이 강한 살충제들을 만들어 뿌려대고 내성이 생긴 후엔 더 강한 살충제를 만들었다. 결과는 전 세계적으로 토양이 황폐해지고 자연환경이 훼손되는 등 폐해가 심각해졌지만 확실한 대안은 현재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고무는 실생활에서 필수적인 자재다. 자동차 타이어, 부속품, 생활물품 등 없어서는 안 될 원재료다. 고무는 고무나무에서 채취돼 황으로 경화됨으로써 실생활에 효과적으로 쓰인다. 그러다 보니 옥수수, 감자, 고구마와 같이 일찍이 투자대상으로써 관심이 쏠렸다.

 

중국은 자국 내의 고무나무를 심을 수 있는 땅이 부족하자 국격 넘어 라오스의 여러 마을과 계약을 맺고 고무나무를 심고 있다. 과거로부터 배웠던 감자 등 획일화된 작물생산의 결과는 병충해의 쓰나미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처럼 고무나무도 똑같은 결과를 보게 될지 모른다. 이 또한 콜롬버스적 대전환이 만들어낸 호모제노센이다.

 

기독교 국가인 스페인 정부는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등 다른 대륙의 노예들과의 결혼을 적극 장려했다. 결혼을 통해서 이교도였던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정부는 식민지 착취와 더불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독교 개종이 그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럽인 + 인디언, 유럽인 + 아프리카, 인디언 + 아프리카의 혼혈인구가 늘어났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인들은 자식들의 성장과정은 절대적으로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었다. 가령 부모의 종교가 무슬림이나 유대교 등이라면 그 자식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거나 받아들여도 태생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기독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페인 사람들은 혼혈인 들을 잠재적인 위험요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방에 다른 집단으로 쌓여간다는 불안함에 그들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인종차별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중요한 것은 스페인 정부의 혼혈 정책으로 식민지 아메리카는 다양한 인종의 거대한 용광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식민지 시대 노예에 대한 착취는 일제가 조선에 했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많은 아프리카, 인디언 원주민을 비롯한 노예들은 자유를 찾아 도망치거나 반란을 일으키기 일수였다. 산악 지대로 도망치거나 때로는 왕국을 만들어 오히려 식민 개척자들과 전쟁을 물론 거래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들을 머룬이라고 칭하는데  미국이 현재의 광활한 영토를 얻는 데에도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 한 예가 루이지애나 매입니다.

 

아이티의 머룬들을 정벌할 계획으로 나폴레옹은 대규모 정벌군을 파견한다. 결국 아이트 머룬의 우두머리 투생을 잡아 죽이는데 성공을 하지만 말라리아, 황열병 시즌이 오자 대부분의 프랑스 군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에 크게 낙담한 프랑스는 미국에 뉴올리언스와 루이지애나를 묶어서 아주 헐값에 팔아버리고 아메리카에서 철수했다. 미국은 이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영토를 기존 2배로 확장할 수 있었다. 또한 북아메리카 서부로 진출해 태평양에 이를 수 있었고 대륙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철도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어마 무시한 자금을 투입했고 결과적으로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유럽 식민 개척자들로부터 자유를 찾아 도망치고 지역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던 머룬들은 아메리카 각지에서 자신들의 조상이 아프리카-인디언의 하이브리드의 전통과 삶의 방식들 토대로 여전히 현대의 자유를 위해 싸우면서 살아가고 있다.

 

콜롬버스적 대전환, 글로벌라이제이션, 호모제노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세계 각지에서 자본주의적 이득을 위한 개발과 착취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먼 조상부터 이어졌던 오랜 삶의 터전에서 강제적으로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관적인 호모제노센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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